삼성전자·퀄컴 2나노 협상 장기화…HBM4가 바꾼 파운드리 전략

삼성전자와 퀄컴이 차세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의 2나노 위탁생산을 놓고 장기간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계약 체결 가능성이 빠르게 거론됐지만 약 9개월 동안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가격을 비롯한 세부 조건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번 협상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대형 팹리스 고객 한 곳의 수주 여부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글로벌 빅테크의 첨단공정 주문을 확보하고 고대역폭메모리인 HBM4용 베이스다이 생산까지 확대하면서 생산능력을 배분하는 기준과 가격 전략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가격 조건을 크게 양보하면서까지 물량 확보에 나설 필요성이 줄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CES 2026에서 공개된 2나노 협상, 9개월째 진행

삼성전자와 퀄컴의 2나노 파운드리 협상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시점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이었다. 당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와 2나노 파운드리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상용화를 위한 설계 작업도 마쳤다고 밝혔다.

협상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4월에는 아몬 CEO가 한국을 방문해 한진만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 등과 만났다. 양사 최고위급 접촉까지 이뤄지면서 반도체 업계에서는 실제 위탁생산 계약 체결이 가까워졌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9월 말까지도 협상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2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양사는 차세대 AP의 2나노 생산을 두고 계속 협상하고 있으며, 가격을 포함한 세부 계약 조건에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퀄컴은 가격을 비롯한 계약 조건에서 높은 수준의 요구를 제시하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 역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해외에서도 양사의 2나노 계약이 가격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협상의 초점이 기술 검토 단계에서 사업 조건 조율로 이동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 역시 양사의 협상이 상당 기간 진행되고 있지만 가격을 포함한 조건이 맞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근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수주 상황과 HBM4 베이스다이 물량을 고려하면 무리한 요구까지 받아들이면서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빅테크 수주 확대가 삼성 파운드리 협상 환경 바꿔

삼성전자가 가격 협상에서 이전보다 여유를 확보하게 된 배경으로는 파운드리 사업의 수주 환경 변화가 꼽힌다. 삼성전자는 테슬라와 165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했으며, 글로벌 빅테크를 대상으로 인공지능과 고성능컴퓨팅용 반도체 물량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복수의 대형 기술기업과 2나노 수주를 협의하고 있으며 추가 계약을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특정 고객의 주문 확보 여부가 전체 가동률에 큰 영향을 주던 상황에서 여러 대형 고객과 첨단공정 협상이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파운드리는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고객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을 담당하는 사업이다. 대규모 생산시설과 첨단 장비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만큼 공장 가동률은 사업 수익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생산라인이 충분히 가동되지 않을 때는 가격을 낮추더라도 주문을 확보해 고정비 부담을 분산하는 전략이 필요할 수 있다.

반대로 수율이 개선되고 여러 고객의 주문이 동시에 증가하면 생산능력의 가치가 달라진다. 한정된 라인을 어떤 고객과 제품에 배정할 것인지가 중요해지고,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주문을 우선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현재 삼성전자와 퀄컴의 협상이 과거와 다른 환경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공정 가격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4나노 공정의 신규 주문 가격을 올렸으며 5나노와 8나노 공정 가격도 인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첨단공정의 가격 인상 폭은 10~15%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산라인을 채우는 것 자체보다 확보한 생산능력을 어느 정도의 수익성으로 운영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HBM4 베이스다이 수요가 파운드리 생산능력 변수로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생산능력 배분에서 새롭게 부각된 요소가 HBM4 베이스다이다. HBM4는 인공지능용 가속기와 고성능컴퓨팅 시장에서 활용되는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로, 여러 메모리 다이를 적층하고 이를 베이스다이와 결합하는 구조를 사용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업계 최초로 HBM4 양산과 상업 출하를 시작했으며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용 공급도 본격화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실적 발표에서도 HBM4와 SOCAMM2의 상업 판매를 시작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HBM4 주문 확대는 메모리 사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베이스다이 생산에 파운드리 공정이 활용되면서 삼성전자 내부의 첨단공정 생산능력 배분에도 직접적인 변수가 되고 있다.

대만 반도체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는 삼성전자가 4나노 파운드리 생산능력의 절반 이상을 HBM4 베이스다이에 배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증가하는 HBM4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4나노 생산능력 확대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도 HBM4 물량만으로 4나노 생산라인의 여유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파운드리 가동률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었다면 현재는 HBM4 베이스다이와 AI·HPC용 반도체를 포함한 여러 주문 가운데 생산능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퀄컴 2나노 계약, 가격과 생산 배분이 최종 변수

퀄컴은 세계적인 모바일 AP 설계 기업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중요한 고객이다. 동시에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대형 고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익성을 크게 양보하기 어려워진 사업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이번 협상은 2나노 기술 적용 여부뿐 아니라 가격과 생산능력 배분, 계약 조건을 종합적으로 맞추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 정상화를 위해 경영과 기술 분야의 역할도 나눠 운영하고 있다. 한진만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은 글로벌 고객과의 신뢰 회복과 신규 수주 확대에 집중하고 있으며, 남석우 파운드리사업부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은 공정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퀄컴의 2나노 협상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CES 2026에서 협상 사실이 알려진 이후 약 9개월이 지나도록 계약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종 가격과 세부 조건에 대한 양사의 입장 조율이 실제 계약 성사의 핵심 단계가 됐다.

향후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양사가 가격 조건에 합의해 실제 양산 계약으로 이어질지 여부다. 동시에 삼성전자가 증가하는 HBM4 베이스다이와 AI·HPC용 주문, 2나노 신규 고객 물량 사이에서 첨단공정 생산능력을 어떻게 배분할지도 파운드리 사업 전략을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전망이다.